독서, 일기 쓰기 -> 글쓰기, 토론 -> 입시, 자소서
저학년에서 고학년으로 갈수록 논술학원을 보내는 목적이 진화한다. 그 기저에는 국어성적이라는 부가 효과도 있다. 저학년에 논술학원을 써칭하는 부모님들은 아이에게 독서 습관과 글쓰기 기본기를 다지게 하려는 목적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당장 영어, 수학 점수 올리기처럼 투쟁적이지 않고 기초체력을 튼튼히 하려는 부모의 큰 그림이다. 내 아이이기 때문에 , 이왕 투자(?) 했으니 효율성과 효과성을 따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여 논술학원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는 시스템을 아주 잘 마련해 놓고 있다.
우선 커리큘럼이다. 내노라하는 국문학 전공자들이 책이란 책은 다 리뷰하고 아이들 발달정도에 따라, 세계적인 움직임과 교육의 지향점, 정책 등을 고려하여 정밀하게 권장도서를 만들고, 올바른 독서활동을 할 수 있도록 교재를 만든다. 일반의 부모가 집에서 하기엔 불가능한, 철저하고 검증된 시스템이다. 학부모가 처음 논술학원에 상담을 하러 가면 빼곡히 꽂혀있는 책들에 마음을 사로잡힐 것이다. 좋은 책들이 이렇게 많고, 이 책을 자유롭게 볼 수 있겠다는 기대와 희망에 상당히 설렐 것이다. 교사로 갔던 나 역시도 논술학원에 가득한 책들을 보며 그런 기대를 했었다.
학원 시스템 안에는 교사 육성도 포함된다. 개인 지도가 선생님의 실력에 의존한다면 학원은 학원의 시스템을 믿고 보내는 것이다. 강사는 학원에서 엄선하여 교육한 일정 수준 이상의 선생님들이다. 논술지도사 자격증 소지자, 교육학 전공자, 국문학과 전공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잘 짜여진 교재는 일정 수준의 인력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스템이다.
아이 관리 역시 시스템화 되어 있다. 아이의 개인 파일에는 논술학원에서 읽고 쓴 기록, 선생님의 피드백이 차곡차곡 쌓이며 학부모에게 전달된다. 아이가 논술학원 다닌지 한두 달 쯤 지나 파일을 받아본다면 '역시 학원 보내길 잘했다.' 는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이 밖에도 친구들과 함께 배우며 독서토론을 하고, 다른사람 생각을 이해하고, 사회성을 기르고.... 등등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 좋은 걸 왜 안해? 왜 딴지를 걸려고 하지?
일단 일주일에 한 권 이라는 꿈과 현실에 관한 이야기다. 아이가 저학년일 때 짧은 동화책은 가능하다 치자. 과연? 일단 패스하고, 책이 조금씩 어려워지고, 그림이 없어지고, 독서 자체가 숙제가 되면서 아이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아니, 읽던데? 아니, 안 읽었다. 글씨를 한번 쫙 보았을 뿐이다. 내용을 말해 보라 하면 전혀 알지 못한다. 그림이 없기 때문에 머릿속에 이미지도 없다. 누구나 교과서를 읽었는데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다.
그림 동화는 괜찮겠지? 그렇지 않다. 그림책이야 말로 내용과 함께 그림이 전하는 메세지를 한장 한장 보고 생각하고 자신의 느낌을 남기는 것이다. 난 그림책은 시를 읽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시는 길지 않지만 오래 읽는 글이다. 행간에 자신의 생각을 집어 넣으며 읽는 글이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그림을 함께 읽는 것이 그림책이다. 아이는 짧은 동화 속에 나오는 글씨를 다다다다 읽어봤을 뿐이다. 심지어 무얼 읽었는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아 물론 모든 아이가 다 그런다는 것은 아니다. 진심 책읽기를 좋아하고, 그쪽에 재능이 있는 아이들이 있다. 머리가 좋고 말 잘 듣는 아이들도 많다. 미술, 음악, 체육... 이런 것들은 재능이라 하면서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것은 그냥 시키면 하는 것, 학생이면 하는 것이라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책을 잘 읽는 것도 재능이다. 그런데 부모는 재능 없는 아이들도 논술학원 보내면 일주일에 책 한권 읽을 거라는 환상을 갖는다. 그냥 그 아이의 손과 입을 스쳐갈 뿐인데, 그것을 독서 기록으로 남기고 투자에 대한 결과로 자위한다.
이런 현상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욱 심각해진다. 논술학원은 철저히 아이들을 읽힌다는 방침을 고수한다. '읽지 않으면 수업을 들을 수 없다.' 같은 초강수를 든다. 그러니 아이들은 거짓으로 읽고 온다. 교재의 질문을 보고 답을 찾아온다. 난 읽지 않은 아이가 90%라는 점을 확신한다. 이것은 국어시험, 영어시험 문제 푸는 요령이다.
먼저 문제를 읽고 본문 보기, 왜? 그렇게 안하면 시험시간 안에 못 푸니까. '뭐로 가든 이해했고, 내용 파악 했고, 핵심 정리했으면 된 거아냐?' ...와... 논술학원 보냈더니 논리 한번 기가 막히네.
학원은 결국 정규교육의 입시를 따라가게 되어 있다. 논술학원이 이상한(?) 게 아니라 입시 '논술'이 그렇다보니까 결국 그렇게 되는 거 아니겠는가... 내 말은 논술학원이 백해무익이라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아이를 '독서'하게 하려고 논술학원에 보내는 거라면 그건 안 될거라는 현실적인 조언이다.
'그래서 넌 뭘 느꼈니?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거기 답 나와 있잖아요. 인간의 허무 ... 에 대한 자각..... 에 대한 비판....' 도대체 그 말뜻을 알고나 있는 건지... 난 실제로 대학원 논문을 준비하는 학생을 지도한 적이 있는데 그 친구가 어찌나 저런 대답만 해 대던지, 그의 느낌, 생각을 들으려면 정말 많은, 다양한 질문을 해야 했다. 성인이 된 사람들도 '솔직한 당신의 생각'이라는 질문 앞에 너무 어려워 하고, 스스로 답답해 하고, 꽤 울기도 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우수한 성적으로 정규교육을 마쳤지만, 논술학원도 다녔지만 수백 권의 독서와 독서기록과 글쓰기를 하면서도 자기 생각은 없었던 경우가 많다. 왜? 십여명의 아이들과 함께 일주일 한권씩 책을 쳐 내려면 시간이 없다.
중학생 클래스를 가르칠 때 항상 책을 안 읽어오는 아이가 있었다. 그 친구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 수업을 하기가 어려웠다. 다같이 진도를 나가야 하는데 그 아이가 읽지 않으니 학원 방침에 따라 교실 밖에서 해당 책을 읽게 해야했다. 그 친구 때문에 다른 학생들의 분위기가 싸해지기 일수였고, 분명 밖에서는 보통의 아이었을 학생이 여기서는 모자란 열등생 취급을 받았다. 아이가 책을 읽지 않는 것 또한 학원 선생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라 마음 속으로는 그 친구가 취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 논술학원을 그만두기를 바랐다. 사실 난 그 친구가 너무 이해가 됐고, 꼬박꼬박 책을 다 읽어왔다며 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들이 더 이상하게 보였다.
'책 다 읽었니?' '네' 그러고 나선, 교재를 펴고 토론이라는 이름의 답맞추기가 시작된다. 돌아가면서 아이들에게 한문제씩 풀어(푼다는 말도 이상하지만) 보게 하고 그에 대해 선생이 해설을 조금 붙이는 정도가 딱 맞는 시간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한 문제 정도만 담당하면 된다. 사실 책을 읽지 않아도 학원에 1년 이상만 다니면 눈치껏 풀 수 있다. 대답을 못한다고 선생이 벌을 주는 것도 아니고, 정 모르겠으면 잘 모르겠다고 말하면 선생은 그냥 친절히 설명해 준다. 이 모든 것은 책을 읽지 않아도 가능하다.
학원에서는 책을 읽지 못했으면 학원에 3~4시간 전에 와서 읽으라고 한다. 과연 3~4시간이면 읽을 수 있는 책인가? 나도 그렇게는 못하는 시간이다. 글씨를 읽을 수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게다가 그 정신없는 학원 로비에서 책을 읽는다고? 그런 집중력이 있었으면 진작 읽었겠지. 기본적으로 아이들은 학교, 학원, 숙제로 뺑뺑이 도느라 독서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어쩌면 학원에서 대신 읽어주는 기능을 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건 고학년으로 갈수록 확실해진다. 이미 초등 고학년부터 상당히 어려운 책을 읽는다. 열심히 일하는 연구원님들이 트렌드에 맞춰 학생이 읽어도 되는 성인 베스트셀러도 많이 포함하고, 그 어렵다는 인문학책들도 척척 읽어내게 한다. 그 모든 게 학원에서는 가능하다. 정확하게는 '읽는다'고 보여지는 것이...... 그런 책을 읽은 아이들이 대견한 부모님들...... 지적허세는 논술학원이 한 몫 돕는다.
그럼 뭐야? 논술학원에서는 안 읽은 책도 읽는 척 하는 요령을, 혹은 읽었다고 거짓말하는 걸 가르치는 거다.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 토론(이라는 이름의 답맞추기를) 하면 읽은 것처럼 느껴지니까 거짓말이라는 죄책감 같은 것도 없다. 어쨌든 학생 사회에서 왕따 보다는 약간의 비겁한 방법을 택하는 게 아이 정신 건강에 좋을테니까. (언젠가 외국인이 '한국 사람은 거짓말을 부끄러워 하지 않더라. 이상하다.' 라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우리가 가진 '정직'의 스탠다드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럼 선생은 뭐하는 거야? 아이가 책을 안 읽고, 읽은 척 하는데?
학생 아래 학원 선생 아닌가? 요즘 선생은 서비스업이다. 아이들을 질책하거나 스트레스를 주는 권한이 없어진 지 오래다. 선생도 자기 실적이 있는데 아이들이 못한다고, 왜 자기 얼굴에 침을 뱉나? 아니, 못하는 아이들도 살살 달래서 읽고 쓰게 해야 선생이지... 학원 선생이 신인가요, 개인지도도 아니고, 말 안돼는거 다 아시죠? 이하 생략.
그래서 말인데 요즘 선생하기 참 힘들다. 한번은 아이 글쓰기를 가르치고 싶다고 찾아온 학부모가 있다. 아이가 외국인학교에 다녀 한글 글쓰기가 취약하다는 이유였다. 어머니는 일기 지도를 부탁했고, 빨간 펜 지도 같은 건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틀린 글자를 잡아준다고 아이 글에 손을 대면 아이가 기 죽어서 글쓰기와 담을 쌓는다... 고 어떤 유명한 글쓰기 선생이 말 했다는 거다. 헐... 외국인 학교 다니며 영어 스펠링은 외우면서 한글 철자 틀린 것도 잡아주지 말라고? 그럼 난 뭘하지? 걍 일기 쓸 때 옆에서 잘한다, 잘한다 해주는 보모? 집에 아직 쌀이 있다는 걸 기억해 내고 서둘러 도망쳤다.
그렇지만 성과는 분명 있다. 독서 노트, 글로 빼곡한 원고지 같은 아이의 아웃풋을 파일에 정리 해 넣고, 선생은 코멘트를 달아준다. 이 내용을 학부모가 받아보고 기뻐한다. 난 아이 글을 꽤 꼼꼼히 봐 주는 편이었다. 몇달 쯤 지나 갑자기 현타가 왔다. 아이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잘 고쳐지지 않는 글버릇이 있다. 이걸 계속 지적한다는 건 아이도 실망이고, 논술학원 보내 봤자 달라지는 것 없고, 선생은 뭘 가르친 거야? 이렇게 될 게 뻔하다. 결국 내 문제, 봐주는 아이가 수십명인데, 글 읽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코멘트를 길게 할 수록 누워서 침 뱉기...... 왜 다른 선생들이 후루룩 대략 읽고 한 두마디 끝에 써 주는 지 알겠다. 아...... 텐션 조절이 필요한 거구나. 이쯤되면 아이에 대한 걱정 보다는 나에 대한 걱정이 든다. 그러니까 학부모도 기뻐하고, 나도 적당히 편하게 가는 게 모두가 행복한 길이다. '잘 해 보이게' 하는 것도 선생 실력이구나.
성실히 일하는 지혜로운 선생들에게 누가 될까바 내 이야기로 한정하고 말을 줄이겠다. 이러한 '인지상정'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논술학원 보내서 아이가 확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마시라는 말씀을 드리고자 함이다.
정리하자면
진정한 독서를 목적으로 논술학원을 택하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다.
(읽기, 쓰기 보다는 국어수업, 입시에는 효과적일 수 있다.)
'아이가 이런 책도 읽어요... ' 는 허무하다. 안 읽었으니까.
학원에 오래다니며 생기는 매너리즘이 반드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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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학원, 장기간 보내면 시간과 돈이 샙니다.
아이의 소중한 시간을 아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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